이달의 특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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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ASH COURSE OF THE MON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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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강론 2017. 6. 25 - 용서하기 전에 용서 청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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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하기 전에 용서 청하기

신분도 신부의 강론 중에서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두 번째 예고(마태 17,22-23)를 접한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왔고 물었습니다. “하늘나라에서 누가 제일 큰 사람입니까?”(마태 18,1) 그리고 이 제일 큰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한 주님의 답변과 가르침이 마태오 복음 18장에 걸쳐서 이어집니다. 하늘나라에서 제일 큰 사람이라고 하면 뭐니 뭐니 해도 그 하늘 나라를 자신의 것으로 삼은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누굴까요?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5,3),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5.10). 하늘나라는 바로 그들의 것입니다. 영으로 가난함, 의로움으로 인해 박해를 받음, 그것이 하늘나라에서 제일 큰 사람이 되기 위한 조건입니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 18장에서 계속 이어지는 이 조건들을 볼까요? 어린이들처럼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되는 것과 주님의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는 것(18,4-5)입니다. 참 역설적입니다. 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영으로 가난한 사람,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 자신을 낮추고 힘없고 낮은 사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라 하시니까요.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정말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되라 하심인데 그것이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 되기 위한 조건입니다.

 

계속해서 볼까요? 작은 이라 하여 걸려 넘어지게 하지 않아야 합니다(18,6-9). 작은 이들 한 명이라도 그들이 작고 보잘 것 없고 가난하다 하여 업신여기지 않아야 합니다(18.10).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야 합니다(18,12-14). 형제를 죄를 지었을 때 그를 찾아가 타일러야 합니다(18,15-17). 그리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청하는 것을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믿고 둘이 마음을 모아 청해야 합니다(18,19). 무엇을 청해야 하나요? 그들 형제(18,15-17)의 회개를, 용서를 청해야 되지 않을까요?


베드로 사도께서 물으십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제게 죄를 지으면 그를 몇 번이나 용서할까요? 일곱 번까지 할까요?” 주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일곱 번까지가 아니라 일흔 번을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시오.”(18,21-22)

 

하지만 이어지는 복음에서 형제를 용서하는 것에 앞선 자세를 우리는 배웁니다. “악한 종아, 네가 간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그 빚을 모두 삭쳐 주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 종을 불쌍히 여겨야 할 줄 몰랐더냐?”(18,33) 누군가를 용서하기에 앞서서 우리가 먼저 용서받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고 살아가지만 사실 우리가 먼저 용서를 청해야 할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자비로운 분이시기에 우리도 자비를 구할 수 있듯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먼저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용서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마치 그리스도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을 박고 있는 자들에게 용서를 청하셨듯이(루카 23,34) 우리 역시 용서를 청하고 용서를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받아들이라고 하시는 듯합니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60여 년 전의 전쟁의 아픔과 상흔이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서로의 잘못과 서로의 아픔에 대하여 분노하고 밟고 이겨내려고만 하는 체제의 경쟁 속에 여전히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남과 북은 삶과 가치를 공유(간추린 사회 교리 386)하는 하나의 민족이라는 사실입니다. 갈라진 것은 다시 원래였던 하나의 상태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길에 있어서의 자세에 대해 오늘 복음에서 그 원리와 길을 찾습니다. 상대의 죄와 잘못에 대해서 끊임없이 용서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아니, 용서하기 이전에 우리 사회와 역사 안에서 용서를 청해야 하는 부분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세가 먼저 필요하지 않을까요?


저는 기도의 요점을 정하면서 복음 해설서를 참고하지 않도록 합니다. 절대적으로 불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복음 내용 자체에 더 집중했으면 하는 것이지요. 복음은 대충 보고 해설서에 더 많이 의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럴 경우에는 기도 안에서 하느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해 오시는가 보다 말씀의 의미를 생각하는 데만 골몰하기 쉽습니다. 복음 말씀을 머리로만 생각하게 되지 복음 말씀을 내 마음에 품고 자리에 앉아 있지 않게 되지요. 무엇보다도 복음 말씀을 아주 단순한 마음으로 글자 그대로 읽어 내려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해설의 말씀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시는 그 말씀 자체가 훨씬 더 중요하고 더 풍요롭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기도의 요점은 몇 개나 정하는 것이 좋을까요? 두세 개 정도 정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저는 신학생들에게 하나만 정하라고 말합니다. 한 군데에 집중적으로 머물기를 바라기 때문이지요. 어느 방법을 써도 무방합니다. 그리고 기도 요점을 정할 때는 사랑’, ‘기쁨’, ‘용서와 같은 명사로 끝나는 것보다는 서로 사랑하여라’, ‘원수를 사랑하여라와 같이 하나의 문장으로 끝나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말씀이 너무 긴 것은 좋지 않습니다. 너무 긴 것은 자꾸 되뇌일 수 있도록 짧게 재구성하는 것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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