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특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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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ASH COURSE OF THE MON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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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강론 2019. 03. 31 - 우리는 하느님의 노예인가?

우리는 하느님의 노예인가?

 

최재용 신부

사순 제 4주일

 

 

이 이야기는 세계에서 제일 훌륭한 사랑의 장편이란 평을 가졌습니다. 이 이야기는 아들의 회개보다 아버지의 깊고 넓은 사랑을 더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먼 거리에서 돌아오는 그의 아들을 본 것은 그가 늘 아들을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두 말없이 용서해 주었습니다. 용서에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남북전쟁 후 어떤 사람이 링컨 대통령에게 “남부의 반역자들을 어떻게 처단하겠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링컨은 “그들이 배반한 일이 없었던 것처럼 우대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사랑의 본질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참아주고 모든 것을 덮어주고 친절합니다. 그러나 이 사랑스런 아버지와는 반대로 그 탕자의 형은 법의 의무만을 따지는 율법주의자로서 그 동생의 귀의를 싫어합니다. 형은 자기의 의로움을 자랑하며 죄인의 구원보다는 멸망을 바라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표상하고 있습니다.

그의 태도를 볼 때 그동안 아버지께 순종하며 지낸 것은 마지못한 의무적 행사일 따름이었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봉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동생을 “내 동생”이라 하지 않고 “당신의 아들”이라 함으로 보아 그에게는 동정의 빛이 전혀 없습니다.

그는 구렁텅이에 빠진 자를 끌어내기는커녕 더 처넣을 무정하고 오만한 심보의 소유자였습니다. 이와 비교해 볼 때 하느님의 사랑이 무한히 자비로운 것임을 알 수 있고, 하느님의 사랑이 사람의 사랑보다 넓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을 대할 때 우리는 놀라고 존경하며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형의 종교는 율법주의자로서 법을 의무로서만 지켰을 뿐, 그 정신은 버렸습니다. 율법주의의 잘못은 너무나 소극적인 즉 “하지말라”만을 엄격히 따르는 데 있습니다. 형의 마음에는 의무의 실행은 있어도 사랑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과 형제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윤리는 냉정한 면에서 볼 때 옳다고 하겠으나 경건과 사랑에 뿌리를 박지 못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정확하지만 또한 무자비했습니다. 그는 아버지 하느님께 대해 자신을 노예시하였습니다. 그는 외지에서 고생하는 동생을 생각하거나 아버지의 슬픔을 동정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노예화된 신앙이 아닌지, 바로 형과 같은 종교를 갖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공격하는 데 있어 벌이 있으니까, 상이 있으니까, 현세에 이득이 있으니까 하는 것이 아닙니까? 만일 우리가 이런 정신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형과 같은 냉혹한 신자요, 요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비록 내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준다 하더라도, 또 내가 남을 위해서 물 속에 뛰어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부모를 공경함음 물론 정성을 다하여 불편없이 지내시도록 재정적 뒷받침을 해드려야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진정한 효성입니다. 부모에 대한 고마움, 공경심, 그리고 진정한 형제애 이것이 바로 부모님께 대하여 취할 태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원죄와 본죄로 당신 곁을 떠났던 우리들을 노예로 삼지 않으시고, 당신의 사랑스런 외아들 그리스도를 팔아서 우리들을 다시 사셨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귀한 자식들입니다. 어떻게 이분 앞에서 사랑이 없는 노예로 자처하겠습니까? 망극할 일입니다.

왜 우리는 숨져 가는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성약을 구하러 첩첩산중을 헤매며, 자기 손가락을 잘라 그 생피를 아버지 입에 넣어드릴 수 있는 사랑이 없단 말입니까? 우리는 하느님을 또한 형제들을 어떤 이득 때문에 사랑함도 아니요, 일부분의 정성으로 사랑함도 아닌 오직 몸 전체를 다버리면서까지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으로 갚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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